이상형 +일기

사람을 처음 볼 때, 손을 본다. 그리고 무릎의 모양도. 이런 얘길 하면, 친구들은 나를 '변태'라고 하지만. 특별한 외관의 이상형은 없는데, 이상적인 손 모양과 무릎 모양이 있다. 딱히 어떤 정해진 이상적 모양이 있다기보다는 선을 본다. 선에서 느껴지는 뭔가가 있는 손이 있다. 그런 손을 만나면 혼자 웃음이 지어진다. 하지만 한번도 이상적인 손과 무릎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것이었던 적은 없었다. 아직도 사람을 만나면 손을 관찰하는 습관이 있다. 의외로 작은 부분이 생각보다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선이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해준다. 일단 손은 합격.








기억의 상실, 동기화된 망각. +일기


런던으로 오던 비행기안에서 언니가 내 가방안에 몰래 넣어둔 노트 한권을 발견했다. 출국한다고 이리저리 쫓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마무리 지어야 할 일들에 정신없던 그 시간들 동안 언니는 노트에 우리 어렸을 적 모습이 담긴 사진들, 엄마 아빠 할머니 사진들을 오려 붙이며 우리 어렸을 적 이야기들을, 언니와 나만이 공유하는 추억들을 써내려갔나 보다. 막상 그 노트를 받았을 때는 채 다 읽지 못하고 짐가방 한 쪽 깊숙이 넣어두었다가 이사하고 짐을 정리하다 그 노트를 다시 발견하고는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중간쯤 읽었을까, 언니는 나에게 많이 미안하다며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있었다.



우리 어렸을 때 너만 두고 혼자 집을 구해 나와서, 그러면 안되는 거 였는데, 그땐 나도 너무 어렸고 나 혼자서도 너무 벅차서 네 마음까지 신경쓰지 못했다고. 언니로서 그게 가장 마음에 걸렸다고. 미안하다고. 아마도 평생 그럴거 같다고.

당황스러웠다. 나는 아무런 기억이 없었다. 몇 번을 읽었다. 그리고 기억이 되살아 난 건지 아니면 언니가 말해준 내용에 기반해 상상을 해 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몇 몇의 장면들이 영화처럼 스치며 눈물이 났다.
언니와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부터 우리는 부모님과 떨어져 단 둘이 살아야 했었다. 매일 매일이 전쟁처럼 두살 터울인 언니와 나는 무척 많이 싸웠고 힘든 시기를 서로 공유하고 의지하기 보다는 침묵과 외면으로 각자 그 시기를 힘겹게 버텨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나는 언니를 많이 의지했었던 것 같다. 부모님보다도 언니가 나의 가족이었으까.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혼자 살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언제, 어떻게, 언니가 이사를 나갔는지. 나는 그때 무얼했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건, 고등학교 고학년 무렵부터 나는 혼자 살았다는 것이다. 1-2년간의 기억이 통째로 없다. 그 시절 나는 미술학원에서 입시를 준비하며 미친듯이 그림에 빠져있었고 학교 친구들과의 기억은 고스란히 있는데. 집에서의 기억은 없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잊기 위한,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지키고자하는 일종의 방어기제였을까?
정서적 요인이 망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한 프로이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을 것을 망각하려는 무의식적 경향을 동기화된 망각이라고 말했다. 잊고 싶을만큼 상처가 컸을 그때의 내가 안쓰럽기도 했지만 나란 사람은 세상 참 편하게 산다는 생각이 든다. 언니는 그때의 일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평생을 미안할거라 말하는데, 반면 나는 속 편하게 잊고 살고 있으니.
그러고 보면 나는 참 잘 잊는다. 건망증도 심하지만,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 얼마나 이기적이고 쉬운 방법인가. 그렇게. 상처받지 않기 위해. 소중했던 기억들조차 어딘가 깊숙한 곳에 밀어넣어 버리고는 기억의 문을 잠가버리는 나라는 사람은 또 얼마나 비겁한가. 그런데 그게 과연 진정한 치유일까. 현재의 나는 또 어떤 기억들을 내 머릿속에서, 마음속에서 밀어내려 하며 살고 있는걸까. 얼마나 많은 기억들을 잊어버린채 살아가게 될까.






봄. 이소라. +일기


런던의 봄은 비 그리고 구름 +런던 생활의 기록

5주가 넘도록 비가 오고 흐린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2월 초부터 벌써 봄이 오나 싶을 정도로 좋은 날씨가 계속 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겨울로 돌아간 4월 한달.
지겹도록 흐리고 지독하게 우울한 날씨의 연속.
그리고 5월, 또 다시 비가 내린다.

이 비가 그치고 구름이 걷히면
영영 겨울일 것 같은 이곳에도 다시 해가 비추겠지.



길이 끝나면 거기
새로운 길이 열린다.

한쪽 문이 닫히면 거기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겨울이 깊으면 거기
새 봄이 걸어 나온다

박노해의 '길이 끝나면' 중



 

3월 어느날,
날씨가 좋았고 딱히 할 일이 없던 날이었던 것 같다.
Primrose Hill에서 보낸 하루.



런던에서 일하기 - Pret a Manger +런던 생활의 기록



이번 주를 마지막으로 해서 그간 10개월 동안 해오던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다. 프렛(Pret a Manger)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 건 사실 영어를 향상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주변의 모든 상황에서 영어를 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겠다고 마음먹고 외국인 친구들과 공유하는 집으로 이사를 하고, 프렛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작년 6월-7월 사이의 일이다. 그동안 매일 같이 아침 6시에 일어나 출근하고, 하필이면 하루 중 가장 바쁜 출근시간에 일해서 물마실 틈도 없이 일해야 했던, 그래도 일이 끝나면 스탭들과 모여앉아 커피를 마시며 수다떨던, 지겹게 반복되던 생활도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니 섭섭한 마음이 앞선다.
 
프렛은 커피와 샌드위치, 샐러드 등의 가벼운 음식을 파는 가게인데, 그 역사가 꽤 길다. 1986년에 친구였던 두 영국 청년이 빅토리아 스테이션 근처에 처음 가게를 운영했던 것이 시초이다. 그 빅토리아 점은 현재 본사 사무소가 운영되고 있다. 현재는 영국 내에만 250개의 매장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큰 규모의 회사다. 런던에 방문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한 골목만 지나면 프렛 매장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영국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브랜드이다.
웹사이트 참고: www.pret.com

Pret a Manger는 프랑스어로 먹을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국내에서 수확한 안전한 재료로 신선하게 만들어 제공한다는 게 프렛의 좌우명이다. 프렛에서 판매하는 음식이라 봤자 샌드위치나 샐러드, 스프 정도가 다지만 그 종류가 다양하고 맛도 좋다. 그런데 프렛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상품 그 자체 보다도, 프렛이 가지고 있는 관리체계였다. 직원을 관리하고 교육하는 방법이 상상 이상으로 체계적이고 효과적이다.

채용이 되면 10주간의 트레이닝 기간을 거치게 되는데, 각 단계에 따라 프렛에 관련된 모든 지식을 익히고 경험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있다. 트레이닝의 첫 날, 4권의 두꺼운 책(프렛의 역사 및 이념 등, 상품의 제조 및 관리법, 커피제조법, 위생 규칙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이 주어지고 매일 매일 정해진 분량을 공부해서 몇 번의 정식 테스트를 거쳐 통과해야만 일을 계속 할 수 있다. 그 양이 상당해서 아르바이트생인데 뭘 이렇게 까지 시키나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사실 고용주 입장에서 보면 한 명의 스탭이라도 자회사의 역사과 이념을 이해시키고 모든 스탭이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도록 함으로써 고객의 만족도를 높이려는 취지인 것이다. 뭐 그 덕분에 최소한 위생, 식품, 건강 관련 어휘력엔 도움이 된 듯하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미스터리 쇼퍼'라는 제도인데, 일종의 위장손님이다. 프렛 사무실에서 고용한 - 손님으로 위장한 - 고객들이 각 지점을 방문하여 그 가게과 직원들을 평가하는 것이다. 평가 대상은 청결도, 진열 상태, 가게안의 분위기(?), 직원의 친절도, 정확도, 복장, 스피드 등등 이다. 그 결과에 따라 매주 각 지점에 보너스가 지급된다. 한편으로 보면 일하는 사람들을 절대 안이해질 수 없도록 만드는 숨막히는 방법 같기도 하지만 그것의 영향은 컸다. 미스터리 쇼퍼가 다녀간 후에 각 지점으로 평가서가 날아오기 때문인데, 서비스를 제공한 직원의 이름부터 방문한 시각, 스무가지 정도의 항목에 따른 세세한 묘사와 잘한 점, 잘못한 점, 분발해야 할 점 등이 적혀지기 때문에, 만약 그 고객을 상대한 직원이 실수를 하거나 그 시각에 샵에 부족한 점이 있었다면, 그 샵의 모든 직원들에게 보너스가 제공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내가 일했던 지점은 거의 모든 면에서 항상 좋은 점수를 받는 편이어서 늘 보너스가 나왔었다. 이 의미는 매니저가 철저하게 관리하고 그만큼 스탭들에게 전해지는 요구사항도 많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스탭들의 스트레스와 불만도 적지 않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모두 일한 것 이상의 보너스를 늘 받아갈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만약 그 직원이 특출나게 완벽한 서비스를 제공했을 경우, Outstanding Card라는 제도가 있는데, 이 경우 상당한 양의 보너스가 추가로 지급된다. 일하는 기간동안 미스터리 쇼퍼를 감격시켜 아웃스탠딩 카드를 받아보겠다며 의욕을 불태웠지만, 불행히도 나에게 미스터리 쇼퍼를 상대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위장고객이 아닌, 한 단골 고객이 프렛 본사에 나를 칭찬하는 이메일을 보내 매니저로부터 칭찬-보너스가 아닌-을 받기도 했었다!!

미스터리 쇼퍼와 같은 맥락에서, 프렛은 사소하지만 직원들을 고양시킬 수 있는 많은 제도를 실행한다. 예를 들면, 트레이닝 기간을 거치고 정식 멤버가 되면 트레이닝 기간동안 나에게 가장 도움을 주었고 감사하고 싶은 멤버를 5명 뽑으라고 한다. 그래서 5명의 이름을 적어내면 그들에게 보너스가 지급된다. 처음 그 말을 듣고 참 서양식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작은 제도를 통해서 팀 분위기를 더욱 좋게 만들고 서로 협조 하도록 만드는 건 사실이다.   
한국에서의 경험에 비춰 생각해보면, 한국에서는 일을 잘 하는 것에 대해 칭찬하고 대가를 지급하는 것에 인색하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보너스에 대한 이야기 만은 아니다. 잘하면 기본인거고 못하면 크게 질책당하는 식이랄까? 프렛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당연히 해야할 임무를 한 것 뿐임에도 팀 리더나 매니저는 항상 고맙다, 잘했다고 말해주었다. 한국인과 서양인들의 표현방식의 다름이라고 무마시킬 수도 있겠지만, 순간순간 격려하고 작은 것에도 고맙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 함께 일하는 사람들 모두에게(국적에 상관없이) 기분 좋은 일이었다.

프렛에서 일하면서 디자이너로서 그것의 디자인을 관찰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개인적인 취향으로 프렛의 첫인상에서 디자인이 좋다는 느낌은 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지만, 역시 디자인도 익숙함을 반영하는지 이제는 거리에서 별모양의 이 로고만 보면 친근하다.

Pret a Manger의 메인 로고



좌측은 예전 로고이고 우측은 현재 쓰이고 있는 로고이다. Pret a Manger의 줄임말인 PRET을 메인 로고에 쓰고 있어 단순하면서도 기억하기 쉽다. 프렛의 로고는 두껍고 폭이 좁은 단순하면서도 약간의 곡선을 드러내는 글자체가 배경 이미지인 별과 겹쳐서 프렛만의 독특한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예전 로고의 어두운 빨강과 금색의 조합을 버리고, 새로운 로고로 바뀌면서 빨간색과 흰색으로 조합된 로고가 조금 더 젊고 활기찬 느낌이다. 상품 포장 디자인을 살펴보면, 로고와 대비되는 세리프 계열의 서체를 사용함으로써 자연친화적, 유기농 상품의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다. 



전체 샵 분위기, 매장마다 조금씩 다른 인테리어를 가지고 있지만 프렛의 메인 색인 살짝 어두운 빨강과 흰색이 조화되어 있는 모습이다. 이것은 스타벅스의 녹색, 네로까페의 파랑색과 대비를 이루며 프렛만의 색깔로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지금 돌아보면, 첫 주에 긴장된 얼굴로 어리숙하게 일하던 모습이 생각나 웃음이 난다. 초반엔 함께 일하는 스탭들이나 손님들의 주문도 잘 알아듣지 못해 곤욕을 치룬 적도 많았는데.. 특히 손님마다 주문하는 커피의 종류가 너무 다양해서, 예를들면 라떼에도, 엑스트라 핫 스트롱 스키니 라떼 혹은 웜 디카프 마끼아또 with 엑스트라 워터, 이런 식이다 보니, 그런 주문을 하는 손님을 원망스런 눈으로 바라보곤 했었다. 그래도 나중엔 어느 손님이 어떤 커피를 즐겨 마시는지 주문하지 않아도 미리 내주는 정도에 이르렀지만 그렇게 매일 수백 명의 고객들을 상대하는 것도 만만치는 않았다. 하지만 그 10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그곳에서 일하면서 나는 또 새로운 것을 느끼고 배웠다. 잘 갖춰진 체계를 통해서 혹은, 나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일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그동안 함께 아웅다웅 일했던 모두에게 감사하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슬픈 건 그동안 가난한 유학생의 배를 채워주던 프렛 멤버 골드카드의 혜택(무려 50퍼센트 할인)이 사라진다는 것...

또 다른 시작을 앞두고 있는 지금, 이 모든 경험 또한 나에게 어느 부분인가에서 힘이 되리라 믿는다.







수첩1 +일상

스물아홉. 기록.

명주에게 보낸 수첩.

3월의 첫날. +런던 생활의 기록

하루가 눈 깜짝할 새에 흘러가 버린다. 늘 계획한 것보다 조금씩 때론 하나도 다 채우지 못한 하루를 보낸다. 그 기분이 참 찜찜하다. 자책감이 든다. 늘 너무 많은 목표를 세우는 걸까. 아니면 어느샌가 나는 이토록 게을러져 버린걸까. 잘 모르겠다.

런던에서 자전거타기 +런던 생활의 기록


우연한 기회에 새로운 자전거가 생겼다. 친구의 부탁으로 친구의 친구에게 물건을 전달하러 나간 자리에서 그 친구를 따라나왔던 분에게서 자신의 자전거를 팔고싶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그 자리에서 자전거를 넘겨받기로 했다. 애써 찾으려 하지 않아도 인연은 이처럼 문득 찾아온다. 그렇게 찾아온 내 세번째 자전거와 런던에서 겨울을 났다.

해가 짧은 런던의 겨울에 자전거를 타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습관처럼 침대에 누운 채로 날씨부터 체크한다. 비라도 오는 날이거나 유난히 지친 날에는 이제 자전거 타기를 포기하고 런던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할까 하루에도 몇번 씩 고민했다. 하지만 런던의 교통비는 한달기준으로 런던 시내(1-2존)에서 이용하려면 120파운드.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약 20만원이 훌쩍 넘는다. 게다가 가장 발빠른 수단인 지하철을 이용한다고 해도 자전거로 가는 것보다 빠르지도 않을 뿐더러 중간에 멈춰서는 일이 비일비재 하기 때문에 그 정도의 가격을 치루면서까지 이용하고 싶지 않다. 자전거를 이용하는 것이 건강을 위해서나 경제적인 면을 따져보아도 혹은 시간효율적인 면에서도 탁월한 선택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전거 이용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했던 것은 런던의 겨울이라는 악조건 때문이었다. 
특히나 새벽 6시에 일어나 해가뜨기도 전에 집을 나서야 하는 나로서는 어둠이 주는 두려움은 생각 이상이어서 아침마다 오늘 하루만 지하철을 탈까하는 유혹이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곳(West Hamstead)에서 일하는 곳(Liverpool steet station)까지 자전거로 걸리는 시간은 대략 50여분. Liverpool street station에서 다시 Tottenham court Road까지 약 20분, 여기에서 다시 집으로 약 40분. 하루 약 2시간 동안 자전거를 타다보니 목요일 정도 되면 아침에 온몸이 뻐근할 정도로 피로가 쌓여 일어나기조차 힘이 든다. 그런 날은 어쩔 수 없이 자전거를 포기하고 비싼 지하철 싱글 티켓을 이용하기도 했다(싱글 티켓으로 하루 이동하면 최소 7.5파운드, 14000원 정도). 그러고 나면 곧 후회하게 되지만, 가끔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자전거를 유지하기 힘들게 만드는 또 하나의 난관은, 자전거 유지비용이 생각보다 많이 든다는 것이다. 어두운 시간에 자전거를 타려면 전조등과 후미등은 필수품인데, 몇파운드 하지 않는 라이트 조차 떼어가는 좀도둑이 많아서 그때마다 새로 사야했고(지금은 자전거를 묶어둘 때 아예 떼어서 들고다닌다) 또 중간에 타이어에 펑크가 나기라도 하는 날이면, 자전거 가게에 들러 타이어 튜브를 교체해야하고, 그러고 나면 또 브레이크가 고장이고.. 늘 새로운 문제들-내가 전혀 손쓸 줄 모르는-이 발생한다. 그런 이유로 앞으로 자전거를 직접 수리하는 법을 차례 차례 배울 생각을 하고 있지만 쉽게 엄두가 나지 않는다..
또한 자전거를 타면 옷이나 신발이 쉽게 닳는다. 매일 매일 두시간씩 험하게 자전거를 타서인지 튼튼한 청바지도 안장에 수십차례 스치다 보니 금새 해어져 구멍이 생긴다. 그래서 버린 바지가 벌써 몇개. 페달에 긇히고 부딪혀 신발도 금새 망가진다. 그렇게 원하지 않아도 또 사야하는 일이 생기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생각해보면 어쩌면 얌전히 지하철을 이용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가끔 고민되지만 이제 조금씩, 어둡고 추운 런던의 겨울도 끝이 보이고 있다. 지난 주부터 낮에는 15도를 약간 밑도는 이곳의 날씨는 벌써 봄, 아니 여름이 시작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따뜻하다. 가끔 부득이한 이유로 자전거를 가지고 나오지 못한 날에는 자전거를 타고 쌩쌩 달리는 사람들을 보면 억울한 생각이 들 정도로 자전거 타기에 좋은 날씨가 계속 되고 있다. 이제 부터는 돈을 아끼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사이클이기 보다는 진정으로 사이클을 즐길 수 있는 시기가 돌아온 것이다.




자전거를 건네 받은 날, 런던 테이트 브리튼 앞에서.


1 2 3 4 5 6 7 8 9 10 다음